경영자는 디자인을, 디자이너는 경영을
경영자들은 결코 충동적으로 디자인을 구입하는 법이 없습니다.
디자인을 통해 이익을 볼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만 디자이너와 계약을 하고 클라이언트가 됩니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다른 경쟁 디자이너보다 고객이 될 기업과 제품에 대해 제대로 알고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함은 물론, 그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경영자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만 계약서에 도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의 목적은 고객의 창출이다”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에 충실하자면 디자인 비즈니스도 결국 고객을 설득하기 위한 연구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아무리 철저하게 연구하고 설득을 잘한다 해도 경영자는 늘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업무의 결과를 앞에 놓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디자이너의 설명만을 듣고 판단해야 하는 업무의 속성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낯선 디자이너의 능력을 가전제품을 고를 때처럼 쉽게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유사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경력있는 디자이너를 찾아 보기도 하지만, 그가 이번 일에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상황도 다르거니와 경쟁 회사를 누를 수 있는 독창적인 대안이 나올지의 여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애꿏은 디자인료만 자꾸 물고 늘어지지만, 무조건 싼 곳을 선택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불안감만 더해가게 됩니다.
이래저래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경영자는 결국 자신의 판단에 따라 디자이너를 선택하고 디자인을 결정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관련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심사숙고해도 될까말까한 일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풍부한 경험’이나 ‘사용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경영자가 아마추어의 안목에 불과한 자신의 선택을 고집하기 시작하면 디자이너는 전문가로서의 자존심도 상할 뿐만 아니라 의욕이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프로젝트는 대개 시원스런 결과를 맺기도 어렵습니다. 혹시 결과가 좋아도 문제입니다. 그 공(???)을 서로 차지하려는 것은 웃어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경영자의 비전문적 독단이 오히려 ‘혜안’이라는 평가를 받게 됨으로써 악순환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만은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독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합리적이고 창조적인 디자인을 탄생시키는 조직은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힘들고, 지혜의 축적도 기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실패할 경우 사태는 말할 수 없이 심각해집니다. 이 때는 실패의 책임을 대개 디자이너에게 뒤집어 씌우기 때문입니다. 구태의연한 기획과 부실한 자료, 태부족의 예산과 협력 부서의 외면 등은 문제삼지 않고 뒤늦게 디자이너의 창의력만을 따지고 드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무 것도 주지 않아도 무엇인가를 자꾸 만들어 내는 요술쟁이가 되라는 격이지요.
디자인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출발하는 이러한 경영자의 독단과 불안감은 교육 수준이 높거나 혁신적인 성향의 경영자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도전 정신과 합리성을 외치지만, 세계 최초가 될수 있는 참신한 디자인을 손에 쥐어 주어도 그 가치를 알아보기는 커녕 ‘선진국의 설례’를 요구하는 우를 범합니다. 이 모든 일이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가 서로의 시각을 한 곳으로 일치시키지 못핬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볼 수 없는 것을 챙겨 주고 단점을 보완해 주기는 커녕, 서로 딴곳을 바라보며 불신만 키워갑니다. 디자이너들의 입장에서는 전문가로 대우해 주지 않는 경영자들의 태도가 불만이고, 경영자들은 기업의 필요나 소비자의 욕구에 부합하는 현실적인 해결책보다는 자신의 스타일만 주장하는 듯한 디자이너들이 불만입니다.
경영자에 대한 디자인 교육은 바로 이러한 불안감과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오래 전부터 주장해 오던 것입니다. 클라이언트인 경영자로 하여금 디자인 업무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합리적인 방법으로 상호 협력하는 체계를 구축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영자를 위해 한국 산업 디자인 대학원 IDAS에서 개설한 ‘DIP (Design Innovation for Policymakers)’ 프로그램이나 한국 산업 디자인 진흥원KIDP이 실시하는 ‘디자인 경영포럼’은 디자인 산업 발전을 위한 매우 중요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그 중요성에 비해 국가적인 관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외면 당해왔던 디자인계로서는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디자인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특히 재계는 물론 문화, 언론계와 정책 결정기관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교육에 참여함으로써 디자인 산업에 대한 국가적인 관심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더욱 고무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영자들에게 디자인 교육을 시킨다고 하여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의 근원이 모두 클라이언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당하게 경영자를 설득하고 또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기 위해서는 디자이너 스스로도 디자인의 질을 높일 수 있고 고객으로부터 환영 받을 수 있는 실력의 배양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긴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영업이나 마케팅을 포괄하는 디자이너의 경영 교육입니다. 경제 행위를 하는 모든 사람이 이 분야를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데에는 디자이너도 예외일 수 없고, 특히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불가피하게 관계를 맺고 협력하며 설득해야 하는 디자이너로서는 그 필요성이 더욱 긴요하기 때문입ㄴ다.
이와 아울러 디자인계가 준비해야 할 또 하나의 긴요한 일, 그것은 몇 번이나 강조해 왔듯 초,중,고교에서의 디자인 기초 교육입니다. 경영자에 대한 디자인 교육이나 디자이너에 대한 경영 교육은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그 효과가 나타난다는 장점을 갖고 있기는 하나, 이것만으로는 전 국민이 자연스럽게 디자인 의식을 채득할 수 있는 장기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서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찍이”디자인 교육은 여섯 살 부터도 늦다”라고 그 중요성을 설파한 파파넥(Victor Papanek)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다양한 전문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의 있는 유,소년들에게 실시하는 디자인 기초 교육은 디자인의 중요성과 직능간 협력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디자인 시장의 확대는 물론 국민 모두를 디자인 의식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모처럼 일기 시작한 디자인 산업에 대한 열기를 식지 않게 하고, 디자인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만들기 위해 이제 디자인 기초 교육을 위한 구체적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1999
– 이 글은 ‘디자인, 세상을 비추는 거울’ 디자인 하우스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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